한 생명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또 힘든 일인지 가슴 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 작은 생명이 내게 준 사랑과 행복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요.
2010년 7월 31일, 집
이제 집. 통나무집과 집에서 벌어진 일로 긴 하루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내가 편안해지려는 찰나, “웡웡.” 다스 베이더 화재경보기다. 10초 뒤 “웡웡.” 다시 “웡웡.” 울고 싶다. 너무 피곤하고 오디가 왜 짖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방금 나가서 소변도 봤고, 저녁도 배불리 먹었고, 아직 한밤중도 아닌데. 왜, 왜, 대체 왜?
나와 크리스는 침대에서 마주 보고 눈을 굴린다. 크리스가 말한다. “쟤 왜 저래?”
“누가 알겠어?” 나는 베개로 머리를 감싸고 한숨을 쉰다. 짖는 소리가 사라지길 빌면서. 그리고 기적적으로 소리가 사라진다. 조용하다.
잠시 뒤 세이지가 우리 침실 문을 열어젖히며 외친다. “오디가 방금 마루에 똥 쌌어요.”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냄새가 독가스 담벼락처럼 우리를 타격한다. 나는 마루의 시커먼 덩어리 두 개를 피해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서 키친타월을 가지러 주방으로 향한다. 그때 내 작은 발가락 아래 질척한 게 느껴진다. 출입구 한가운데 얌전하게 놓인 세 번째 덩어리.
우리가 청소하자 오디는 피아노 아래서 우리를 살핀다. 나는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오디를 안아주며 말한다. “걱정 마. 우린 너한테 화 안 났어. 너도 어쩔 수 없었잖아.”
죄책감이 든다.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오디가 짖는 소리를 두세 번 들었다. 하지만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친 소년의 부모처럼….
수의학 문헌에 따르면 개와 고양이는 일곱 살(큰 견종은 다섯 살, 작은 종은 아홉 살)이 되면 노령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나의 작은 마야는 어제 일곱 살이 되었으니 이제 공식적으로 어르신이다. 마야는 여전히 활동적이고, 나와 함께 야외에서 뛸 때는 발랄하고 아름답고 우아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잠을 많이 자고, 오디와 마찬가지로 혹이 생긴다. 수의사 말로는 그냥 지방종이란다. 게다가 눈썹과 턱에는 쥐젖이 생겼고, 눈 아래 털에는 하얀 줄무늬가 났다. 개의 나이로 마야는 이제 나처럼 40대 중반가 되었고, 오디는 70대 후반이다.
늙은 개가 앓는 이빨 질환은 통증을 유발해 과민해지고, 무른 변 때문에 집 안을 더럽힐 수 있으며, 폐 기능 감소로 산소 농도가 떨어져서 에너지 감퇴, 밤에 혼란을 느끼는 경향, 치매로 이어지고, 심장 질환은 개의 운동 능력을 제한해 낮 시간에 많이 자게 만든다. 간의 찌꺼기 처리 과정이 비효율적인 것은 인지 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신장 질환 때문에 소변이 과도하게 만들어져 집에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전립샘비대증은 실금으로 이어질 수 있다. 뇌하수체저하증 때문에 짜증이 늘고, 과식하고, 물을 지나치게 마시고, 초조해하고 집 안에 용변 실수를 할 수 있다. 골 밀도와 근육 질량 감소는 운동성을 떨어뜨리고, 감각이 약해지면 목소리가 커지고 두려움과 공격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늙은 개에게 문제가 있다면 재훈련 시기가 온 것이다.
노견을 돌보는 일은 아이를 돌보는 일과 비슷할까, 아니면 연로한 부모를 수발하는 일과 유사할까? 반려동물이 있는 가족마다 그 역할은 다를 테고, 명확하게 옳고 그른 건 없지 싶다. 오디가 우리 집 첫째라고 농담하지만(세이지가 태어나기 전에 데려왔으니), 우리는 오디를 진짜 돌연변이 아이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디의 노화 과정이 내 부모의 노화와 여러 가지로 닮은꼴이지만, 오디를 작은 어른으로 보지도 않는다. 개는 독자적인 존재인 개고, 온전히 가족의 일부다.
병든 애완동물은 분명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이를 피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냥 손을 떼는 것이다. 진짜 문제를 일으키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가족에게 불편을 끼치기 전에 반려동물을 안락사 시키는 것. 내가 찬성하는 다른 선택지는 적응이다. 그러나 이것도 말이 쉽지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사람 가족의 요구, 마야와 토파즈의 요구, 나 자신의 요구(돌봄 과업에 나를 얼마나 많이 바쳐야 할까?), 그에 반하는 오디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방법을 놓고 심각한 모호함과 양가감정을 발견했다. 이런 질문에는 준비된 정답이 없고, 완벽한 균형도 찾을 수 없다. 불확실함과 죄책감은 항상 존재할 것이므로. 내가 겪어본 바, 보살피는 사람의 역할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날마다 다르다. 오디의 요구와 나의 요구, 가족의 요구는 끊임없이 변한다.
오디가 비즐라 평균수명인 12.5살을 넘게 살았으니 우리는 그럭저럭 잘했는지 모른다.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 잘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말에는 후회가 가득하고, 하지 않거나 말하지 않은 것이 수북이 쌓였다. 나에게는 이 말이 나이 든 동물을 돌보는 사람의 역할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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