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가 열세 살 반쯤 됐을 때, 오디의 삶에 대해 일기를 쓰기로 했다.
오디는 비교적 건강한 편이지만, 나이가 오디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오디의 별명 몇 가지
∙파괴견Destructo-Dog : 설명이 따로 필요 없다.
∙쿠린내Odiferous : 오디는 죽은 것이나 배설물과 관계된 모든 것에서 구르기를 좋아한다.
∙밉상Odious : 가끔 그렇다.
∙갈비씨Boney-Man : 할아버지가 되어 생긴 별명. 오디의 팔꿈치와 무릎, 둔부는 앙상하고 뾰족해졌다.
∙이빨 빠진 불가사의Toothless Wonder : 노견의 또 다른 별명. 오디는 이빨 없이도 놀라운 것들을 먹을 수 있기 때문.
∙사이코Psycho : 정신적인 문제를 놀리는 건 좋지 않지만, 가끔 어쩔 수 없다.
∙레드맨Red Man : 오디의 색깔 때문이지만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친구의 말 훈련소에 간 오디는 넘치는 호기심으로 목초지에 뛰어들었다가, 레드맨이라는 노새에게 쫓겨 꽁무니 빠지게 도망쳐서 트럭 아래 숨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오디를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없었다. 등등
2009년 9월 29일
오디가 식료품 저장실을 열고 물에 타 마시는 비타민 C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비타민 가루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2009년 10월 12일
오디가 내 앞에서 세이지의 방바닥에 오줌을 쌌다. 나를 뻔히 보면서 그냥 쭈그리고 앉더니 시원하게 쏴~.
오늘 오디는 밀가루로 실험을 했다. 통밀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흰 밀가루는 맛있었나 보다. 밀가루의 흔적이 주방 식료품 저장실에서 거실로 이어졌고, 마룻바닥과 카펫 사방에 하얀 폭발 자국이 남았다.
2009년 11월 11일
우리는 오디와 함께 산길을 달리러 갔다. 요즘은 오디가 아주 멀리 가지 못하고, 느긋한 산책조차 기를 쓰고 따라오느라 스트레스 받는 것 같아서 대개 집에 두고 나간다. 세이지도 집에 있었는데, 멀리 달리자고 하면 싫어하지 싶어 오디와 다른 개들을 차 뒷자리에 태웠다. 눈 속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오디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날씨가 꽤 추워서 오디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장담하건대 오디는 내내 활짝 웃었다. 오디가 헐떡거리느라 메기 입술이 위로 올라가서 웃는 듯 보인 건 나도 안다. (‘메기 입술’은 우리가 오디의 입술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다. 이빨 옆에 들쭉날쭉한 그 살 조각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오디가 진짜 웃었다고 믿고 싶다.
2009년 12월 31일
오디는 우리와 침대에서 함께 자기를 좋아했다. 이불 아래로 굴을 파고 들어와서 제일 늦게 일어났다.
오늘 오후에는 오디를 침대에 올려놨더니 지금까지 큰대자로 뻗어서 요란하게 코를 곤다. 아주 활동적인 꿈을 꾸는지 씰룩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다리를 격렬하게 움직인다.
이제 오디가 아주 멀게 느껴진다. 예전처럼 나와 눈을 맞추지도 않고, 애정에는 완전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동물에게 죽음은 무슨 의미일까?
동물은 우리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죽음을 창조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동물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이 정도가 전부는 아니다. 동물은 인간이 아니기에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간단히 말하고 싶은 유혹도 있다. 이는 어리석은 동어반복이다. 동물은 인간이 이해하듯 죽음을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동물이 고유한 방식으로도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일까? 우리는 “‘동물에게’ 죽음은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동물의 인지적·정서적 능력과 사회적 애착, 삶의 경험, 특질을 고려할 때 해당 동물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고 물으면 더 좋겠다.
수의사 마이클 폭스Michael Fox는 “동물이 죽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선언한다. 특히 개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저런 흥미로운 방식으로 반려인의 죽음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읽고 들었는지 다 말할 수 없다. 이 책 한 권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때가 되면 풀어낼 나만의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기록이 담겼다. 죽음에 반응하는 개는 울부짖거나 낑낑거리고, 우울감에 빠져 무기력해하며, 사라진 반려인을 찾거나 밤새 경계를 서고, 시체 곁에서 몸을 웅크린다. 개가 있거나(고양이도 마찬가지) 개와 사는 사람을 안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 하나쯤은 있으리라.
“개는 죽음을 두려워할까?”
“개는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
개는 눈앞에서 다른 개가 죽어갈 때 그 사실을 인식할까?”
“개는 반려인의 죽음을 애도할까?”
동물이 죽음을 인식하는가라는 질문에 정답이 없다.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개는 죽음을 인식하는가?” “침팬지는 죽음을 인식하는가?”라고 해야 더 나은 질문이 된다. 동물행동학의 위험성 중 하나는 개체를 일반적인 전체로 다루는 경향이다. “점박이 하이에나는 낮에 자고 밤에 먹는다”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하자. 누가 “인간은 밤에 자고 낮에 먹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터무니없는 소리 말라고 할 것이다.
나의 개 세 마리는 거부할 수 없는 개다움에도 서로 너무나 다르다. 동물의 임종과 죽음을 생각할 때 개체의 특수성을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 핵심은 동물도 뭔가 생각하고 느낀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한 동물의 ‘해석’은 개체마다, 종마다 고유하고 흥미롭지 않을까―그리고 동물에게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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